호랑이

인간의 실상 – 무상(無常)

오늘은 인간의 실상 예화 중에서 호랑이가 비유하고 있는 무상(無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그네를 쫓아오는 호랑이는 무상(無常)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무상은 죽음(死)입니다. 호랑이가 ‘쫓아오고’ 있는 것은 죽음이 ‘갑자기 덮친다’ 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3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죽음은 100% 확실한 문제입니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게 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모두 머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인생과 크게 관련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은 지금의 내 삶, 행복한 내 삶과는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예를 들어, 집에는 주방도 있고, 화장실도 있습니다. 주방은 가족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고, 대화하는 밝은 느낌의 공간입니다. 반대로 화장실은 냄새 나고, 좁고, 혼자서만 가야 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주방은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고, 화장실은 지저분하고 불결한 공간이니까, 집을 지을 때 주방은 크고 넓게 잘 짓고, 화장실은 만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궁전에 귀족들이 모여 파티를 합니다. 맛있는 음식과 음료가 있습니다. 파티를 즐기다가 생리 현상이 일어나면 바깥으로 나가 숲 속에서 볼일을 봐야합니다. 만약 비라도 오는 날이면 어떨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마음 놓고 음식과 음료를 먹을 수 있을까요?

주방은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기 때문에 잘 짓고, 화장실은 불결한 공간이기 때문에 만들지 않는다면, 주방에서 마음 놓고 음식을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주방과 화장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끊을래야 끊어낼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삶(生)과 죽음(死) 역시 마찬가지의 관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生)’은 소중하게 여기며 좋아하고 있는 것이고, ‘죽음(死)’은 어둡고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다면, 현재의 삶도 마음 놓고 즐겁게 살 수 없습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밝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죽는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지금과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한걸’ 이라고 생각하고, 당장 죽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호랑이’로 비유된 무상, 즉 죽음은 예화에서는 앞에서 쫓아오지만, 실제로는 내 뒤쪽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다가와 덮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죽음에 대해 노소부정(老小不定)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먼저 죽고, 젊다고 해서 나중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22 저녁,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한 콘서트홀에 락 밴드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장에는 6,000명이 모여 있었는데, 총기난사, 방화가 일어나 140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콘서트홀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일상을 마치고 공연을 보러 가는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을 텐데,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불의의 사고로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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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대 종교학과의 기시모토 히데오(岸本英夫)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종교학 교수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생각하고 연구한 사람입니다. 또한, 암으로 10년간 투병하며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도 ‘죽음’을 마주하며 고찰한 사람입니다. 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언제 오든 당사자는 갑자기 찾아왔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는 데 안심하는 마음에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죽음은 와서는 안 될 때에도 찾아온다. 와서는 안 될 장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다. 죽음은 때마침 깨끗하게 청소를 마친 객실에 흙 묻은 신발을 신은 채 서슴없이 들이닥치는 무법자와도 같다.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해도 절대로 기다리는 법이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도, 움직이게 할 수도 없는 괴물이다.
-기시모토 히데오(岸本英夫),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
-타카모리 켄테츠 지음, 저서 <왜 사는가> 중에서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들이닥칩니다. 결혼식을 앞둔 사람에게도 닥치고, 올해 1/1에 일본에 지진이 있었지요. 새 해라서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보러 모이지 않았더라면 불의의 일을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상의 호랑이는 이런 사정을 봐주지 않고 덮쳐오는 것입니다.

연간(年間) 세계의 사망자 수를 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매 년 60,000,000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루에는 160,000명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에도 160,000명 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보면 죽음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들어도 언제나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해결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 사람 평소에 운전을 조심하지 않더라.’라고 생각하며, ‘나는 괜찮아.’, ‘나는 그럴 일 없어.’라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간혹 ‘죽으면 죽는 거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 역시 죽음을 그저 타인의 일로 생각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호랑이로 비유하자면,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호랑이를 보면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나를 위협할 수 없는 공간에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서 뛰쳐나온 호랑이입니다. 울타리가 없는 곳에서 마주친 호랑이를 과연 안심하고 바라볼 수 있을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나는 별로 걱정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건강을 챙기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든지, 운동을 열심히 한다든지.. 이런 행위는 모두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무상의 호랑이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활동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등 뒤에 무상의 호랑이가 한 마리씩 쫓아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호랑이로써 알려주시려고 한 것은 바로 생사의 일대사(生死의 一大事)의 존재입니다. 또한 이 생사의 일대사는 살아있는 지금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불교 가르침은 이 생사의 일대사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설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인간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불교를 듣는 목적이고, 인생의 목적입니다. 무상을 관(觀)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모든 사람, 누구나 불교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가르침을 들으시길 바랍니다.